밤 11시에 문의가 하나 들어와요. "이거 제 피부에 맞을까요?"
답을 못 해요. 써봐야 아니까요. 이 한 문장 앞에서 장바구니가 얼마나 자주 닫히는지, 직접 팔아본 입장이면 아실 거예요.
요즘 동남아 이커머스 진출 얘기가 부쩍 늘었죠. 지마켓 셀러 상품이 라자다를 타고 싱가포르·말레이시아·태국·필리핀·베트남으로 넘어가는데, 연동 상품 수가 700만 개에서 3,000만 개로 늘었어요.
그럼 그 매대에서 지금 1등 하고 있는 브랜드는 누구일까요. 필리핀 틱톡샵 뷰티·퍼스널케어 1위는, 6년 전만 해도 회사원이 혼자 만들던 스킨케어 브랜드예요.
재택근무 석 달 만에 얼굴이 무너졌어요
키스 스타 바르바라는 마닐라 보니파시오 지구에서 미국계 B2B 회사의 사내교육 담당으로 일하고 있었어요. 2020년, 팬데믹으로 집에 갇혔죠.
스트레스와 함께 여드름이 올라왔어요. 약국에 갔더니 수입 브랜드 가격표가 만만치 않았고요.
싼 걸 찾아 헤매다가는 가짜를 만났어요. 필리핀 사람 피부에 맞춰 만들었다는 제품은 잘 안 보였고요.
화장품 업계 경력은 0이었어요. 화학 전공도 아니었고요.
낮엔 회사원, 밤엔 배합 공부 — 여기가 제일 길었어요
그가 한 선택이 좀 무모해요. 개인 자산을 정리해서 호주의 온라인 화장품 배합 과정에 등록했어요. 2년짜리 디플로마 과정이었어요.
회사는 그만두지 않았어요. 그만둘 형편이 아니었거든요.
"회사 일을 병행하는 게 특히 힘들었습니다. 퇴근하고 나서도 잠을 줄여가며 배합 원리랑 스킨케어 기초, 해부학 같은 걸 공부했어요." 그가 나중에 현지 매체에 한 말이에요.
수료까지 1년이 넘게 걸렸어요. 그동안 매출은 0원이었죠. 사업이라기보단 야간 자율학습에 가까웠어요.
거기다 더 두꺼운 벽이 있었어요. 필리핀 손님들은 수입 제품이 로컬보다 낫다고 믿었거든요.
"수입 제품이 국산보다 좋다는 오해를 깨는 게 아직도 제일 어렵습니다." 그는 이 말을 인터뷰마다 반복했어요.
돈도 인맥도 유통망도 없는데, 손님 머릿속 순위표에서 이미 지고 들어가는 자리였어요.
그래서 상품명을 이렇게 지었어요
배합을 다 익힌 그는 현지 화장품 제조사를 찾아가 자기가 만든 배합표를 내밀었어요. 그리고 2020년 10월, 제품 세 개로 시작했어요. 쇼피와 라자다에 올렸고요.
이거 보세요, 제품 이름이 이래요. 5% 나이아신아마이드 세럼. 알파아르부틴 세럼. 나이아신아마이드 토너.
감성적인 브랜드 네이밍이 아니에요. 성분이랑 농도를 그대로 상품명 자리에 박은 거예요. 시적이진 않죠.
지금 제일 많이 나가는 두 개도 똑같아요. '5% 나이아신아마이드 + 히알루론산 민감성 포뮬러 세럼', '7% 글라이콜릭산 스킨 리뉴잉 토너'.
이게 왜 중요하냐면요.
'나한테 맞는 건 운'이라는 말을 깨러 갔어요
필리핀에는 '히양(hiyang)'이라는 말이 있어요. "이건 나한테 맞아"라는 뜻이에요. 맞고 안 맞고를 운처럼 여기는 정서죠. 우리도 비슷하잖아요. "저는 그거 안 맞더라고요."
이 브랜드 마케팅 총괄은 공개 행사에서 이렇게 말했어요. "오랫동안 히양이 제품이 좋은지를 재는 기준이었어요. 그런데 피부 궁합은 운이 아니라 화학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들은 손님한테 성분표 읽는 법부터 가르쳤어요. 한국 화장품 쓰는 순서를 가르쳐서 유럽에서 자리 잡은 예포다 이야기와 결이 비슷하죠.
'7일 만에 하얘집니다' 같은 문구는 안 썼어요. 창업자 말로는 "피부는 그렇게 안 움직이니까". 임상 자료를 보고 현실적인 기간을 적었어요.
묶음 상품도 안 팔았어요. "사람마다 피부 고민이 다른데 세트로 파는 걸 저희는 안 믿습니다."
여기가 핵심이에요. 이 브랜드는 싸게 판 게 아니라, 손님이 스스로 비교할 수 있는 눈금을 쥐여줬어요. 농도가 적혀 있으면 옆 제품이랑 붙여볼 수 있잖아요. 비교가 가능해진 순간, 수입이냐 로컬이냐는 덜 중요해졌어요.
그랬더니 제품이 28개로 쪼개졌어요
고민별로 쪼개서 팔기로 했으니 품목 수가 늘 수밖에 없었어요. 지금 28개예요.
가격은 공식몰 기준 5% 세럼 30밀리가 169페소, 7% 토너 100밀리가 246페소. 우리 돈으로 4천 원, 6천 원 언저리예요. 포장이랑 브랜딩에 돈을 안 써서 나온 값이에요.
그런데 소량 다품종은 만들기가 까다롭죠. 외주 공장은 한 번에 많이 찍어야 단가가 맞으니까요.
그래서 출시 6개월 만에, 번 돈으로 자기 생산시설부터 지었어요. 광고에 태우지 않고요.
이 순서가 재밌어요. 다품종이 먼저였고, 공장은 그걸 감당하려고 따라온 거예요.
성적표는 이렇습니다. 세럼 한 종이 틱톡샵에서 300만 개, 토너가 150만 개. 둘이 합쳐 450만 개를 넘겼어요. 2024년에서 2025년 사이 매출은 310%나 늘었고요.
지금은 직원이 120명을 넘고, 케손시티에 394제곱미터짜리 사옥을 열었어요.
광고판 한 장으로 온 나라를 술렁이게 했어요
마닐라에 정체불명의 옥외광고가 걸린 적이 있어요. 브랜드도 로고도 없이 딱 한 줄이었죠. "우리 헤어지지 말자, 제발. — D가."
온 나라가 어느 커플이 깨졌나 추측했어요. 기사가 42건 붙었고, 인플루언서 영상은 6천만 회를 넘겼어요.
그리고 정답이 공개됐어요. 헤어지자던 상대는 사람이 아니라 뾰루지(breakout)였어요. 기사 43건이 더 붙어서 총 93건이 됐고, 이 캠페인은 아시아태평양 스티비 어워즈에서 금상을 받았어요.
창업자는 이렇게 말했어요. "사람들이 우리 이름을 알기도 전에, 우리가 한 약속이 진짜처럼 느껴지게 만들었어요."
이런 장난이 통한 건, 손님이 이미 이 브랜드의 제품 언어를 알아듣고 있었기 때문이에요.
우리가 훔칠 건 딱 하나예요
동남아 매대가 열리는 중이라는 말, 이제 좀 실감 나시죠. 필리핀은 지마켓 역직구가 이미 닿아 있는 다섯 나라 중 하나고, 쇼피와 알리는 경북까지 내려와 입점 상담회를 열었어요.
그런데 상세페이지를 그대로 번역해서 올리면, 거기서도 똑같은 질문을 받아요. "이거 저한테 맞나요?"
데르모레푸블릭이 한 건 그 답을 대신 해준 게 아니에요. 손님이 스스로 답할 수 있게 숫자를 앞으로 꺼내준 거예요. 성분, 농도, 걸리는 기간. 이 세 개가 상품명과 첫 화면에 있으면 손님은 비교를 시작해요.
이건 화장품 밖에서도 돌아가요. 러닝 양말이면 발바닥 쿠션이 몇 밀리인지, 반려동물 사료면 조단백이 몇 퍼센트인지. "프리미엄"이라고 쓰는 대신 숫자를 쓰면, 처음 보는 브랜드도 비교 대상에 낍니다.
그리고 이게 소량 다품종이랑 붙어요. 기준을 세워서 팔면 고민별로 상품을 쪼개게 되고, 쪼개면 한 번에 적게 만들어도 되니까 재고에 현금이 덜 묶여요. 유행이 바뀌어도 갈아타기가 쉽고요.
마닐라에서 잠 줄여가며 배합을 외우던 회사원이 한 일은, 결국 성분표를 상품명 자리로 옮긴 것뿐이에요.
지금 파는 상품 하나만 골라서, 이름 앞에 숫자 하나 붙여보면 어떨까요. 생각보다 티가 확 나요!
박민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