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0명.
미국 속옷 브랜드 스프링로즈가 첫 제품을 팔기도 전에 모아둔 대기자 수예요. 이 회사는 고객 문의를 상품 개발 노트처럼 쓰거든요.
그 시점에 회사가 가진 건 도면 한 장이 전부였어요. 창업자는 속옷은커녕 옷을 만들어 본 적이 없었죠.
그런데도 900명이 이름을 남기고 기다렸어요.
할머니의 아침
2015년 여름이었어요.
니콜 쿠에르보는 인턴 때문에 본가에 들어와 있었거든요. 근처로 이사 온 할머니 로사를 자주 보던 시기였고요.
여든아홉인데 수업까지 나가고 혼자 사는 분이었죠. 그런 할머니가 아침마다 옷 앞에서 멈췄어요.
골관절염 때문에 브라 후크를 못 채웠거든요. 얇은 어깨끈은 살에 빨간 자국을 남겼고요.
선물이라도 하자 싶어 백화점에 갔는데요. 살 게 없었어요.
"그때 있던 선택지는 딱 두 개였는데, 둘 다 흉했어요." 쿠에르보가 나중에 인터뷰에서 한 말이에요.
브라 하나 사러 갔다가 회사를 차리게 된 셈이죠.
그가 배워둔 건 옷이 아니라 사람한테 제대로 묻는 법이었어요. 브라운대에서 창업을 공부하고, 딜로이트에서 4년 동안 공공부문 컨설팅을 했거든요.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나 2000년대 초에 마이애미로 건너온 이민자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할머니 친구들부터 만났어요. 다들 같은 얘기를 하더래요.
결국 100명 넘게 인터뷰하고, 500명 넘게 설문을 돌리고, 물리치료사·작업치료사 30명 이상과 붙어서 설계를 잡았죠. 돈이 든 일은 아니에요. 물어본 거예요.
팔 물건 없는 3년
회사를 세운 건 2020년 7월이에요. 켈로그 경영대학원에 들어간 둘째 주였어요.
첫 제품이 나온 건 2023년 9월이고요. 3년 넘게 팔 게 없었다는 뜻이에요.
제일 오래 걸린 건 공장이었죠. "제품을 만드는 일이 지난 몇 년 중에 제일 울퉁불퉁한 길이었어요." 본인 표현이에요.
속옷 경력이 0이라 몇 번 헛발질을 했대요. 그다음엔 방법을 바꿨죠. "이미 해본 사람을 데려와요." 풀타임 채용 대신, 필요한 기간만 전문가를 붙이는 식으로요.
디자인도 혼자 짜지 않았죠.
인터뷰를 몇 달 돌린 뒤에 자문 한 명이 해커톤을 해보라고 했거든요. 시간도 돈도 아까웠지만 사흘 만에 사이트와 규칙을 만들어 올렸어요. 그러고 대학마다 메일을 돌렸죠.
70명 넘게 신청했고, 디자인 24개가 들어왔어요. 그중 1등 한 안이 지금 양산되는 그 브라예요.
수요는 그보다 먼저 쟀어요. 페이스북에 광고를 돌려서 모은 대기자가 앞에서 말한 900명이에요. 팔 물건이 없으니까, 물건 대신 기다릴 사람을 센 거죠.
그렇게 나온 이지온 모빌리티 브라는 여덟 가지 방법으로 입을 수 있어요. 한 손으로도, 발로 밟고 올라서도, 머리 위로도요. 미국 특허청에서 실용특허와 디자인특허를 같이 받았죠.
처음엔 자석을 일부러 안 썼어요. 심박동기 같은 의료기기를 몸에 지닌 손님이 있으니까요. 그래서 벨크로로 갔어요.
브라 네 개, 입구 일곱 개
여기가 제가 제일 오래 들여다본 대목이에요.
스프링로즈가 지금 파는 브라는 네 가지예요. 속옷이랑 세탁망까지 다 합쳐도 낱개 상품이 일곱 개고요. 가격은 56달러에서 74달러 사이고요.
상품 수로만 보면 아주 작은 스토어죠.
그런데 홈페이지 메뉴를 열면 들어오는 문이 일곱 개예요. 관절염, 치매, 섬유근육통과 만성통증, 엘러스단로스증후군, 한 손, 척추측만, 어깨 수술과 오십견.
브랜드 이야기로 매대를 짠 게 아니라, 손님이 자기 몸을 부르는 말로 짰어요.
이게 왜 중요하냐면, 이런 손님은 '어댑티브 브라'라고 검색하지 않거든요. "오십견 브라", "한 손으로 입는 브라"라고 쳐요. 자기 상태를 먼저 말하니까요.
계산대도 같은 방향이죠. 미국에서 의료비 적립 계정 카드로 결제할 수 있게 열어놨거든요. 이 물건이 패션보다 생활 보조에 가깝다는 걸 돈 내는 자리에서도 인정한 거예요.
상품을 늘린 게 아니라 문을 늘렸어요. 재고는 그대로예요.
고객 문의와 수요 사이
출시하고 나서가 더 재밌어요.
쿠에르보는 아직도 인스타그램 DM을 직접 읽어요. 일주일에 열 개에서 스무 개쯤 온대요.
교환이나 환불 문의가 아니에요. "이 부분은 좀 아쉬웠어요" 쪽이 더 많대요. 본인 말로는 "그걸 다음 생산분 개발로 가져갈 수 있느냐"의 문제고요.
시제품을 손님한테 그냥 보내고 답을 DM으로 받기도 하죠. 이메일보다 이쪽이 낫다더라고요. 인스타에서는 사람들이 긴 글을 더 잘 쓰거든요.
그렇게 스포츠브라 하나가 바뀌었어요. 원단이 바뀌고, 자석이 붙는 방향이 바뀌고, 잡아주는 부품 위치가 바뀌었어요.
설계도에는 '자석 방향' 같은 칸이 없잖아요. 입어본 사람만 아는 항목이죠.
DM으로 새 제품 요청도 들어와요. 어댑티브 체스트 바인더를 만들어 달라는 얘기가 그중 하나예요. 로드맵에는 올렸대요.
그런데 바로 만들진 않죠. "합의가 있는지 봐요." 쿠에르보가 그렇게 말했어요.
요청 한 건은 요청이고, 같은 요청 스무 건은 수요예요. 그 사이를 안 재고 발주하면, 대답은 창고가 대신 해주거든요.
손님을 숫자로 다시 본 적도 있죠. 1년 중 제일 큰 할인으로 산 사람들의 반품률이 다른 손님의 두 배였대요. 그래서 무료배송 조건을 손봤죠. 좋은 손님 쪽으로 무게를 옮기는 얘기는 좋은 고객에게 더 집중하기에서 한 번 다룬 적 있어요.
우리 스토어의 입구 개수
스프링로즈가 잘된 이유를 한 줄로 줄이면 이래요. 손님이 자기 상황을 설명하는 말을 그대로 매대 이름으로 옮겼어요.
이건 공장도 자본도 필요 없는 일이에요.
스마트스토어로 치면 이런 거죠. 상품 열 개를 새로 올리는 대신, 문의함과 리뷰에서 손님이 자기 상황을 말한 문장만 따로 긁어모으는 거예요.
"어깨 수술하고 나서요", "손목이 아파서요", "엄마가 혼자 못 입으셔서요".
그게 기획전 이름 후보고, 상세페이지 소제목 후보고, 검색어 후보예요. 상품 수는 그대로인데 들어오는 문만 늘어나요. 리뷰에서 단어를 캐는 방법은 고객후기로 매출 3.5배 높이기에 정리해뒀죠.
요청이 들어왔을 때는 한 박자만 쉬어보면 어떨까요. 이번 달에 같은 말을 몇 명이 했는지부터 세보는 거예요.
한 명이면 다음 발주 때 고칠 항목이고, 스무 명이면 새 상품이에요.
이번 주에 문의함 한 번만 열어보세요. 새 상품 아이디어보다 먼저, 손님이 자기를 설명한 문장이 몇 개나 쌓였는지부터요!
민지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