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자 위에 상자가 쌓인 빈방이 있었어요. 영국의 한 웨딩 행사용으로 사 둔 티셔츠 수백 장인데, 나눠 주지 못한 채 그대로 상자에 남았거든요.
2020년 봄, 코로나로 영국 결혼식이 줄줄이 멈춘 때였죠. 루시·로스 멩기니 부부가 웨딩 브랜드를 연 이듬해였습니다.
부부는 그 티셔츠를 결혼식이 취소된 신부들에게 공짜로 보내기로 했어요. 수백 장으로 시작한 증정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죠. 로스의 기억으로는 그렇게 공짜로 나간 티셔츠가 1만 5천 장입니다.
남은 상자를 비우는 게 목적이었다면 수백 장에서 끝났을 거예요.
이 브랜드, 식스 스토리즈(Six Stories)는 지금 연매출 1,500만 파운드(약 265억 원)를 내요. 미국 백화점 입점 같은 뒷날의 성과까지 쌓인 숫자죠. 투자는 한 푼도 안 받았고요.
손님이 제일 서운한 날 팔지 않고 건넨 한 장. 그게 그 손님이 돌아오는 날의 첫 주문이 됐습니다.
기다리는 신부에게 팔 옷이 없었어요
둘은 유치원에서 처음 만났어요. 열여섯 살에 사귀기 시작했고, 대학 대신 영국 슈퍼마켓 세인즈버리의 관리자 연수 과정에 들어갔죠.
그 뒤 루시는 맨체스터의 마케팅 회사 소셜 체인에서 마케팅 디렉터로, 로스는 디지털 컨설팅 회사에서 일했습니다. 남부러울 것 없는 직장인 부부였던 셈이에요.
시작은 자기들 결혼식이었어요. 루시가 화동이 입을 튤 투투를 직접 만들었는데, 그걸 엣시(Etsy)에 올리자 팔리기 시작했죠.
"창업이 너무 하고 싶었는데, 결혼에 관한 건 뭐든 좋아서 거기서 시작했어요." 루시의 말입니다.
주문이 밀려들자 동네 스카우트 회관을 빌렸어요. 동네 엄마들과 은퇴한 할머니 23명이 일주일에 치마 수백 벌을 만들었죠.
그러다 루시가 빈틈 하나를 봤어요. 신부들은 결혼식 날까지 한참을 기다리는데, 그동안 살 게 없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2019년 10월에 낸 게 결혼식 전에 입는 '브라이디(BRIDEY)' 티셔츠. 기다리는 신부를 위한 옷이었습니다.
결혼식이 하나도 열리지 않던 봄
다섯 달 뒤, 영국 전역에 봉쇄령이 내려졌어요. 결혼식은 취소되거나 기약 없이 밀렸죠.
로스는 그때를 이렇게 떠올립니다. "웨딩 업계는 특히 초토화됐어요. 결혼식이 하나도 안 열렸으니까요."
부부에겐 런던 브라이덜 패션 위크에서 선보이려던 재고가 있었는데요. 그게 집 빈방에 상자째 쌓였죠. 웨딩 행사에서 나눠 주려던 티셔츠 수백 장도 그 옆에 있었고요.
팔 곳은 막혔는데 버틸 돈도 없었습니다. 루시는 나중에 "투자금도, 안전망도 없이 믿음과 고된 노동만으로 시작했다"고 말했어요.
막 이륙하려던 비행기가 활주로에서 시동이 꺼진 꼴이었죠.
팔 수 없으니 그냥 주기로 했어요
부부의 결정은 손님 쪽에서 나왔어요. 로스 말로는 "전부 손님이 이끈 캠페인"이었다고 합니다.
"결혼식이 취소된 사람한테 티셔츠를 공짜로 주면 어떨까?"
코로나로 결혼식이 틀어진 신부면 누구든 홈페이지에서 티셔츠를 받아 갈 수 있게 했죠. 손님은 배송비만 냈고요.
"쇼피파이에 올리자마자 '핑, 핑, 핑' 하더라고요." 주문 알림이 쉬지 않고 울렸다는 얘기입니다.
인스타그램 팔로워는 이틀 만에 5천에서 2만 5천 명이 됐어요. 하객 없는 결혼식이 이어지던 때, 이 가게엔 하객 2만 명이 새로 생긴 셈이죠.
두 번의 봉쇄 동안 나간 티셔츠가 1만 5천 장. 인터뷰마다 1만 장, 2만 장으로 숫자가 조금씩 다른데, 세다가 지칠 만큼 보냈다는 얘기로 들어 두면 됩니다.
봉쇄가 이어지는 동안 신부들이 모여 수다 떠는 페이스북 그룹 '브라이디 행아웃'과 팟캐스트도 꾸렸어요.
스마트스토어로 치면 남은 몇 상자로 '택배비만 내시면 보내 드려요'를 걸었다가, 신청이 이어지는 만큼 계속 보낸 셈이죠. 대신 아무에게나 말고, 결혼식이 취소된 신부에게만요.
결혼식이 다시 열리자 신부들이 돌아왔어요
결혼식장이 다시 문을 열자, 공짜 티셔츠를 받았던 신부 거의 모두가 손님으로 돌아왔다고 비즈니스클라우드가 전했습니다.
로스가 짚은 이유는 짧아요. "그 신부들은 아직도 우리랑 이어져 있어요. '정말 힘들 때 너희가 곁에 있었잖아' 하고요."
돌아온 신부가 살 물건도 기다리고 있었죠. 결혼식 날 입는 '저스트 매리드' 티셔츠가 39.99파운드, 신혼여행에서 많이들 입는 '와이피(WIFEY)' 스웨트셔츠가 49.99파운드입니다.
루시도 같은 얘기를 합니다. "그 감정적인 연결 덕분에 손님들이 기념일에도, 휴가 때도, 베이비 샤워 때도 돌아와요."
빈방에서 출발한 가게는 3년 내리 해마다 매출이 110%씩 늘었어요. 2024년 순매출은 1,000만 파운드를 넘겼고, 미국 노드스트롬과 메이시스에도 들어갔죠. 지금은 매출의 25%가 미국에서 나오고, 본사 직원은 35명입니다.
투자 제안이 줄을 서는데도 회사를 팔 생각은 없대요.
공짜 티셔츠가 광고보다 오래 남은 이유
공짜로 줘서 잘됐다고만 읽으면 절반만 본 겁니다. 이 무료 증정엔 조건이 세 개 붙어 있었거든요.
첫째, 받는 사람이 정확히 '원래 내 손님'이었어요. 브라이디 티셔츠는 애초에 결혼식을 기다리는 신부의 옷이었죠. 결혼식이 밀리면서 그 기다림이 길어졌을 뿐입니다.
둘째, 손님은 떠난 게 아니라 날짜가 밀린 거였어요. 결혼식은 취소돼도 결혼은 남잖아요. 언젠가 다시 날을 잡을 사람에게 준 선물이라, 그날 돌아올 이유도 같이 생겼죠.
셋째, 택배비는 손님이 냈습니다. 가게 출혈이 줄었고, 진짜 입을 사람만 신청하게 만드는 작은 문턱도 됐을 거예요.
우리 가게에도 이런 때가 옵니다. 비 때문에 밀린 캠핑 시즌, 공사로 늦춰진 이사 철처럼 손님의 날짜가 밀리는 때죠. 그때 손님 마음에 오래 남는 건 할인 딱지보다 '기다리는 동안 쓰세요' 한 장이에요.
웨딩 행사에서 나눠 주려다 상자째 남은 티셔츠 수백 장에서 시작했습니다. 증정은 1만 5천 장까지 이어졌고, 그 신부들의 집에서 다음 결혼식 주문이 왔죠.
날짜가 밀린 손님이 보이면, 할인 쿠폰을 찍기 전에 그 손님이 기다리며 쓸 물건부터 하나 골라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