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도기 회사 해리스(Harry's)에는 남성용 면도기를 쓰는 여성 손님이 약 100만 명 있었습니다. 그런데 2018년 10월, 해리스는 여성용 신상품을 자기 이름으로 내지 않고 '플라밍고'라는 새 브랜드로 냈어요.
손님이 이미 와 있는데 간판을 새로 단 거죠.
신상품을 지금 가게에 얹을지, 새 이름으로 뺄지는 물건이 하나 늘 때마다 돌아오는 고민입니다. 국내 셀러에게는 지금 스토어에 올릴지, 스토어를 하나 더 열지로 옮겨지는 질문이고요.
슬로베니아 마케팅 대행사 플랫 서클(Flat Circle)의 창업자 로크 흘라드니크가 프랙티컬 이커머스 인터뷰에서 이 고민에 답했습니다.
질문은 진행자 에릭 밴드홀즈가 던졌는데요. 단골을 헷갈리게 하지 않으면서 새 상품군을 내려면 어떻게 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흘라드니크가 내놓은 길은 둘입니다. 첫째는 손님에게 묻는 것이에요.
"먼저 손님 말을 들으세요. 뭐가 불편한지, 뭘 사는지 파악한 다음 물어보세요. '제가 뭘 만들어 드리면 도움이 될까요?'"
둘째가 새 브랜드입니다. "한 브랜드에서 배운 걸 새 회사에 쓰는 건 전혀 잘못이 아니에요."
두 길을 나란히 놓고 제가 읽은 기준은 이렇습니다. 단골에게 물어서 나온 물건은 지금 가게에 얹고, 단골이 "이걸 왜 여기서?" 할 물건은 새 이름으로 냅니다.
남편 면도기를 쓰던 여성 100만 명
플라밍고가 나오던 날, 해리스 손님 한 명은 AP통신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내도 이제 해리스를 써요. 자꾸 제 걸 훔쳐 써서 하나 사 줬죠."
회사가 세어 보니 이런 여성 손님이 약 100만 명이었습니다. 수요는 물어볼 것도 없이 확인된 셈이죠.
그런데 플라밍고가 내놓은 물건은 남성용 면도기에 색만 바꾼 게 아니었습니다. 9달러짜리 5중날 면도기 옆에 왁스 키트, 셰이빙 젤, 바디로션이 같이 나왔어요.
파는 방식도 달랐습니다. 해리스는 면도날 정기배송으로 이름을 알린 회사인데, 플라밍고는 낱개로 팔았거든요. 총괄 앨리 멜닉은 여성의 면도 주기가 사람마다 너무 달라서 정기배송이 맞지 않는다고 설명했습니다.
새 이름을 고른 이유는 공동창업자 제프 레이더가 출시 당일 뷰티 매체 글로시에 직접 말했습니다. 여성용을 내 달라는 요청은 해리스를 연 뒤 5년 내내 받았다고 해요.
"그분들이 해리스 손님이라는 건 정말 좋습니다. 하지만 여성만을 위한 제품을 만들면 더 잘해 드릴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죠."
같은 날 폭스5 뉴욕이 전한 레이더의 설명에는 앞 이야기가 있습니다. 해리스를 구상할 때는 남녀 공용 라인도 생각했는데요. 여성들과 면도와 제모, 바디케어 이야기를 나눠 보니 남성 쪽과는 정말 달랐다는 겁니다.
회사 눈에 100만 명은 맞는 물건이 없어 남편 것을 빌려 쓰는 손님이었던 셈입니다.
남성 면도날을 다달이 받아 보는 가게에 어느 날 왁스 스트립이 올라왔다면, 단골은 장바구니보다 주소창을 먼저 확인했을 겁니다.
쓰는 사람은 겹쳤지만 사는 이유와 사는 방식이 달랐던 거죠. 그래서 설명을 처음부터 다시 쓸 자리가 필요했습니다.
국내 스토어에서 그 자리는 스토어 이름과 소개 문구입니다. 스토어 하나에 하나씩만 쓸 수 있는 칸이니까요.
8년 전 결정이라 결과도 나와 있습니다. 플라밍고는 출시 넉 달이 안 돼 미국 타깃 1,800개 전 매장에 들어갔고, 1년 남짓 만에 고객 150만 명을 모았어요.
멜닉이 글로시에 밝힌 숫자가 하나 더 있습니다. 왁스를 산 손님의 40%는 왁스 제모가 처음이었습니다. 해리스라는 이름으로는 만나기 어려웠을 손님이죠.
쿨러 회사 매출의 58%를 낸 컵
반대쪽 사례는 밴드홀즈가 인터뷰에서 직접 꺼냈습니다. 쿨러로 시작해 텀블러를 냈고, 그 텀블러가 대표 상품이 된 예티(YETI)입니다.
예티 쿨러는 너무 튼튼한 게 고민이었습니다. 한 번 사면 다시 살 일이 없었으니까요. 잘 만든 게 죄였던 셈입니다.
그래서 2014년, 쿨러 손님에게 같은 이름으로 20온스와 30온스짜리 스테인리스 텀블러를 냈습니다. 차가운 걸 오래 차갑게 둔다는 약속은 그대로 두고, 크기만 손에 들어오게 줄인 물건이었죠.
예티의 2025 회계연도 실적표를 직접 나눠 봤는데요. 전체 매출 18억 6,849만 달러 가운데 컵과 텀블러 같은 드링크웨어가 10억 8,584만 달러(약 1조 4,500억 원)입니다. 58%예요.
회사를 만든 쿨러와 장비는 40%였습니다.
쿨러 단골은 텀블러를 보고 고개를 갸웃하지 않았습니다. 같은 이유로 살 수 있는 물건이었으니까요. 이럴 땐 이름도, 후기도, 단골도 그대로 따라옵니다.
스마트스토어였다면 알림받기를 눌러 둔 손님에게 신상품 소식을 그대로 보낼 수 있는 경우죠.
새 브랜드에 따라오지 않는 것들
새 이름을 고르면 치를 값이 있습니다. 흘라드니크도 이 대목에서는 조심스러웠어요.
"한 브랜드의 성공을 광고, 랜딩페이지, 제안, 제작팀까지 복사해 붙이면 될 것 같죠. 그렇게 간단한 경우는 드뭅니다."
그가 권한 순서는 시장 크기를 먼저 재고, 돈은 천천히 넣는 겁니다. 대신 기대치도 낮춰 줬습니다. "새 브랜드가 네다섯 번째 카테고리여도 됩니다. 돈이 된다면 안 할 이유가 없죠."
질문을 던진 밴드홀즈도 수염 관리 브랜드 비어드브랜드를 운영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새 브랜드가 끌리지만, 회사를 먹여 살리는 주력 브랜드에서 팀의 집중이 흩어질까 걱정된다고 털어놨죠.
직원을 늘리지 않고 브랜드 수만 늘리는 이야기는 직원은 안 늘었는데 브랜드는 30개가 됐습니다에서 다룬 적이 있습니다.
국내 셀러 기준으로는 이 값이 숫자로 적혀 있습니다. 토스페이먼츠 판매자 가이드가 정리한 네이버 스마트스토어 추가 개설 조건은 가입 6개월 경과, 최근 3개월 매출 800만 원 이상, 구매만족 4.5점 이상입니다. 숫자는 바뀔 수 있으니 신청 전에 판매자센터에서 한 번 더 확인하는 게 좋아요.
거기다 기존 스토어에서 팔던 상품은 새 스토어에서 팔 수 없고, 찜해 둔 고객 데이터도 넘어오지 않습니다. 거기서는 단골도 후기도 처음부터 다시 쌓아야 하죠.
그래서 순서는 묻는 게 먼저입니다. 흘라드니크의 질문은 문자 한 통으로 그대로 보낼 수 있어요. "제가 뭘 만들어 드리면 도움이 될까요?"
답으로 돌아온 물건이라면 지금 가게에 얹으면 됩니다. 단골이 한 번도 떠올리지 않은 물건인데 그래도 팔고 싶다면, 그때 이름을 새로 짓는 거고요.
새 이름은 비싼 선택입니다. 그래도 사는 이유가 다른 손님을 만나려면 치를 만한 값이죠.
어느 쪽인지는 단골이 가장 싸게 알려 줍니다. 물어볼 단골이 한 명이라도 있다면 이미 유리한 자리에서 출발하는 거예요. 오늘 그 한 명에게 먼저 물어보세요.
미나킴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