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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쪽 계약서 마감일만 짚는 AI, 답 쓰는 값은 0원

한이룸 · 2026.10.16 · 읽는 시간 3분

"지급일 하나 물었는데, 왜 계약서 감상문이 세 문단이지?"

납품 계약서 PDF를 AI에 올려 본 분이라면 이 혼잣말이 낯설지 않을 거예요. 날짜 한 줄이 필요했을 뿐인데, AI는 늘 성실하게 글을 써 주거든요.

이 PDF 정보 추출 잡무만 하도록 만든 작은 AI 모델이 나왔습니다. 미국 스타트업 스케일다운(ScaleDown)의 '익스트랙트(Extract)'인데, 답을 새로 쓰지 않고 원문에서 해당 대목을 짚어서 돌려줘요.

값은 입력 100만 토큰(AI가 글을 세는 단위)당 0.05달러예요. 답으로 나오는 글자 값은 아예 0원입니다.

같은 주에 파이낸셜타임스가 오픈AI의 연환산 매출이 알려진 것보다 200억 달러가량 적다고 보도하면서 'AI 거품' 얘기가 다시 돌았죠. 그런데 서류 잡무 쪽 가격표는 반대로 움직이는 중입니다. 오픈AI도 GPT-6를 내놓으며 문서 요약·정보 추출용 저가 모델 '루나'를 따로 세웠으니까요.

큰 AI 하나에 통째로 맡기던 일이 잡무별로 쪼개져 따로 값이 매겨지기 시작한 거예요.

쓰는 AI와 짚는 AI

보통 챗봇은 답을 한 글자씩 지어서 씁니다. 마감일 하나를 물어도 문장을 짓고, 친절하게 요약까지 얹어 주죠.

문제는 짓는 과정에서 생겨요. 스케일다운 공동창업자 닐 파텔은 회사 블로그에서, 그냥 물어보는 범용 AI는 문서에 없는 값을 지어낼 수 있다고 적었어요. 정산 금액에서 0 하나가 바뀌면 웃고 넘길 일이 아닙니다.

익스트랙트는 회사가 '제약 디코딩 모델(CDM)'이라고 부르는 구조입니다. 정해진 답 안에서만 고르는 모델이라는 뜻인데, 추출 모델에게 정해진 답은 원문의 한 조각이죠.

그래서 결과마다 확신도 점수와 원문 속 위치, 그 앞뒤 500자가 같이 붙어 나와요. 날짜를 받으면 그 날짜가 적힌 문단까지 따라오니, 확인하려고 300쪽을 다시 넘길 필요가 없죠.

파텔이 적어 둔 원칙도 하나 있습니다. "문서에 없는 항목은 '없음'으로 돌아와야 하고, 없음도 맞는 답이다." 지급일이 안 적힌 계약서에서 그럴듯한 날짜를 만들어 내지 말라는 얘기예요.

300쪽에 20원 남짓

직접 계산을 해 봤어요. 글자가 빽빽한 300쪽 계약서를 넉넉하게 30만 토큰으로 잡으면 0.015달러, 1달러를 1,340원으로 치면 20원 남짓입니다.

한 번에 100만 토큰까지 넣을 수 있으니 300쪽짜리도 통째로 들어가요. 같은 분량을 오픈AI GPT-6 솔에 넣으면 입력값만 0.6달러, 800원쯤 들고 답 쓰는 값이 따로 붙죠. 글을 안 쓰니 원고료가 안 나가는 셈이에요.

물론 회사가 내건 대표 숫자 '467배 저렴'은 걸러 듣는 게 좋습니다. 비교표를 열어 보면 추출만 따로 뗀 숫자는 오픈AI 모델 평균보다 35배, 앤트로픽 평균보다 91배 싸다고 나와 있거든요. 둘 다 회사가 직접 잰 숫자라, 남이 검증한 결과는 아직 없습니다.

스캔본도 받아요. JPEG·PNG·TIFF 사진이나 스캔 PDF를 넣으면 글자를 먼저 읽어 낸 다음 뽑는 방식이에요. 종이로 받은 거래명세서도 후보에 들어가는 거죠.

아직은 개발자용 API

아쉬운 대목도 있습니다. 지금은 API로만 쓸 수 있어요. 프로그램끼리 주고받는 연결 통로라서, 챗GPT처럼 파일을 끌어다 놓는 화면이 없거든요.

한국어 지원은 공식 문서에 한 줄도 없습니다. 한글 세금계산서를 얼마나 잘 읽는지는 아직 아무도 보여 주지 않았고요.

그래도 반가운 건 방향이에요. 정산서 입력 자동화를 외주로 맡기는 쪽이라면 "문서 한 장에 AI 값이 얼마 드나요?"라고 물어볼 근거가 생겼습니다. 몇십 원짜리 일에 범용 AI 요금을 그대로 얹은 견적이라면 다시 볼 만하죠.

무료 챗봇에 붙일 세 문장

짚는 AI의 규칙은 지금 쓰는 무료 챗봇에도 빌려 쓸 수 있어요. 정산서나 계약서를 올리고 이렇게 붙여 보면 됩니다.

하나, "요약하지 말고 원문 문장을 따옴표 그대로 옮기고, 몇 쪽인지 적어 줘." 지어 쓰는 대신 짚게 만드는 문장이에요.

둘, "적혀 있지 않으면 '없음'이라고만 써 줘." 파텔의 '없음도 맞는 답' 원칙을 그대로 가져왔어요.

셋, "날짜 계산은 하지 말고, 시작일과 계약 기간만 원문 그대로 뽑아 줘." 파텔은 뽑은 값으로 하는 계산을 추출 단계에서 떼어 내 따로 돌리라고 했습니다. 2026년 6월 1일 시작에 24개월이면 끝나는 날은 2028년 5월 31일인데, 이런 셈은 달력이나 엑셀에 맡기는 편이 마음 편하죠.

서류 속 마감일·금액·지급일은 쓰는 일이 아니라 짚는 일이에요. 그리고 짚는 일의 값은 이미 몇십 원까지 내려왔습니다. 감상문을 받아 오던 이번 달 정산서부터, 위 세 문장을 붙여 넣고 원문 줄로 받아 보세요!

— 지급일만 물었다가 받은 감상문은 세지 않기로 한 다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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