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장을 뽑다가 주소 칸에서 손이 멈춰요.
영문 주소예요. 이번 달에만 세 번째죠.
"신기하네" 하고 박스를 닫아요.
해외 진출은 '언젠가 아마존 입점부터'라는 메모 옆으로 다시 밀어두고요.
테넌트뉴스가 이 순서를 뒤집자는 움직임을 전했습니다. 한국온라인해외직판협회가 큰 플랫폼 입점 대신, 내 이름을 건 자사몰로 해외 손님과 직접 거래하는 법을 가르치겠다고 나섰거든요.
첫 시장은 일본, 그다음은 베트남·인도네시아 같은 동남아를 본대요. 권대욱 회장의 말은 짧았어요. "자사몰 기반 직판은 이와는 다른 접근입니다."
그럼 직접 나가서 진짜 통한 브랜드는, 떠나기 전에 뭘 손에 쥐고 있었을까요?
영국 옷 브랜드 보든(Boden)은 꽤 구체적인 걸 쥐고 있었죠. 미국 주소가 찍힌 주문서 3,000건이요.
주식 중개인의 손그림 카탈로그
조니 보든은 원래 런던 증권가의 주식 중개인이었어요. 그 일을 몇 년이나 지긋지긋해했대요.
월가에서 일할 때 동료들이 우편 카탈로그로 옷을 잔뜩 사는 걸 봤거든요. "영국엔 카탈로그가 없었어요. 넥스트(Next) 하나뿐이었죠."
1991년 11월, 첫 카탈로그가 나왔어요.
손으로 그린 지면에 남성복 8가지. 그게 전부였어요.
매장도, 백화점 매대도 없었어요. 종이를 받아 본 사람이 주문을 넣으면 보든이 직접 받아서 부쳤죠.
요즘 말로 하면 처음부터 자사몰 하나로 시작한 브랜드예요.
트위드 재킷 사기꾼과 집까지 건 10년
출발은 처참했습니다.
"처음 10년은 바닥을 기었어요. 돈을 하나도 못 벌었죠."
거기다 사기까지 당했어요. 본인 표현으로는 "트위드 재킷에 시그닛 반지를 낀, 아주 그럴듯한 남자"였대요.
영국 신사 차림을 한 사기꾼이 영국 신사복 가게 사장을 턴 거예요. 각본이라면 너무 뻔해서 퇴짜 맞았을 장면이죠.
돈이 바닥나자 집까지 걸어야 했어요. "어린 두 아이를 데리고 그러는 건 전혀 즐겁지 않았어요."
아내 소피는 펑펑 울었는데, 본인은 "이상할 만큼 태연했다"고 털어놨어요.
조니 보든이 장사에서 '정말 중요한 것'으로 꼽는 게 하나 있는데요.
"살 것 같은 사람에게 카탈로그를 부치는 것."
돈이 없을수록 아무한테나 뿌릴 순 없잖아요. 누가 살지 아는 게 장사의 시작이었던 거예요.
해외 진출 나라를 고른 미국 주소 3,000건
2000년 무렵부터 장사가 확 살아났어요.
그리고 2002년, 숫자 하나가 눈에 걸렸어요. 미국 주소로 들어온 주문이 그해 3,000건.
미국 손님을 노리기도 전이었는데요. 바다 건너 손님이 먼저 손을 든 거죠.
보든은 그 3,000건을 보고 미국행을 정했어요. 그해 미국 사이트를 열고, 미국 손님에게 카탈로그를 부치기 시작했어요.
들고 간 방식도 영국과 똑같았죠. 직접 보내고, 직접 받는 방식이요.
지금도 영국 브랜드들은 미국 손님이 브랜드한테 직접 사는 데 영국 손님보다 거리낌이 적다고 말하더라고요. 영국에선 아직 백화점이 '이거 괜찮아요' 하고 골라줘야 지갑이 열리는 편이고요.
5년 뒤인 2007년, 미국 매출은 5,000만 달러(약 700억 원)가 됐어요. 펜실베이니아 스크랜턴에 미국 물류센터까지 세웠죠.
우리 자사몰로 치면 이런 장면이에요.
주문 목록에 쌓인 해외 주소가 "여기 우리 손님 있어요" 하고 먼저 말해준 거예요. 어느 나라로 갈지 감으로 찍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색을 빼고 젊어진 옷, 줄어든 손님
물론 명단을 쥐고도 미끄러진 적이 있어요.
2023년 여름 발표한 실적이 440만 파운드 적자였거든요. 손님 수도 5% 줄어 180만 명이 됐고요.
조니 보든의 진단은 이랬습니다. "우리가 누군지 잊었어요. 너무 젊게 가서 많은 손님을 화나게 했죠."
색은 줄이고 기장은 짧게, 유행만 쫓은 옷이었대요. 종이 카탈로그도 "디지털이 미래라서 줄였는데, 너무 많이 줄였다"고 했어요.
자기 입으로 스스로를 '완전 바보(nitwit)'라고 불렀을 정도였죠.
새 손님을 쫓다 이미 명단에 있던 손님을 놓친 거예요.
원래 손님이 좋아하던 옷으로 돌아가겠다고 한 이듬해, 보든은 3,460만 파운드(약 640억 원) 흑자를 냈어요. 미국 매출은 21%나 늘었고요.
매장 없이 버틴 미국, 세 번째 가게 자리
지난해 보든 매출은 3억 8,710만 파운드(약 7,200억 원)였는데요. 그 절반 가까이가 미국에서 나와요.
활성 고객은 195만 명, 1년 새 처음 산 손님만 60만 명이 넘어요. 올해 상반기에도 미국 매출은 9% 더 늘었죠.
한 팟캐스트에서 진행자가 깜짝 놀라 되물은 적이 있는데요. 매장이 정말 하나도 없냐고요.
"없어요. 우린 매장 하나 없이 미국에서 두 번째로 큰 영국 옷 브랜드예요."
영국에 매장을 다시 낼 생각은 없냐는 질문엔 이렇게 답했습니다. "미국이 먼저예요. 미국이 우리 최대 시장이거든요."
그런 보든이 2025년 11월에야 애틀랜타에 첫 미국 매장을 냈어요. 올해 7월엔 내슈빌에 두 번째를 열었고, 이번 가을엔 앨라배마 버밍햄에 세 번째가 들어서요.
버밍햄을 고른 이유가 재밌는데요. 그 지역에 이미 있는 손님 수요, 그리고 미국 손님 포커스그룹에서 들은 얘기였대요.
2002년의 3,000건과 똑같은 순서죠. 손님이 먼저 있고, 가게가 뒤따라가요.
해외 진출의 첫 질문은 '어디에 입점할까'가 아니에요. '누가 이미 내 몰에서 샀나'예요.
물론 보든이 미국에 건너가던 카탈로그 시절보다 지금은 새 손님 한 명 데려오는 값이 훨씬 비싸잖아요. 미국에서 직접 팔면 창고·배송비도 만만치 않고요.
그래서 오히려 광고 한 푼 안 썼는데 먼저 찾아온 해외 손님이 더 귀해요. 그 사람들은 바다 건너 받아 가는 수고까지 감수하고 우리 상품을 고른 사람들이거든요.
오늘 자사몰 주문 목록에서 배송 국가가 한국이 아닌 줄부터 세어보세요.
그 숫자가 제일 큰 나라가 우리의 첫 해외 진출 후보예요. 3,000건이 아니어도 괜찮아요. 먼저 손 든 서른 명이면 시작하기엔 충분하거든요!
글 박민지